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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my Nation

‘디 아워스’와 ‘프라하의 봄’을 통해 본 릴케의 진정한 사랑과 소유 본문

자작글/감상, 비평

‘디 아워스’와 ‘프라하의 봄’을 통해 본 릴케의 진정한 사랑과 소유

ARooomy 2022. 1. 16. 15:34

릴케의 사랑, 존재론적 소유를 통하여


 존재와 소유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나 존재냐?’라는 도서의 이름처럼,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 대립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릴케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과 사상에 스며들어있는 존재론적 세계관과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소유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릴케의 사랑은 ‘보다 인간적인 사랑’이다. 이것은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나 ‘대상 없는 사랑’과는 다르다.


사랑하는 대상이 물리적으로 부재하는 상황을 ‘대상 없이 사랑 속에 있는 상황’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랑하는 대상이 떠났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연인으로 남는다. 따라서 둘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완전히 떠났는데도 영원히 사랑의 대상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랑의 대상이 떠났을 때 사랑하는 이의 내면(의식)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잉태되는 것, 그래서 실존을 위한 것은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유의 대상이다. 따라서 대상 없는 사랑은 릴케의 사랑의 의미라고 볼 수 없으며, 소유하지 않는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말할 때는 J. Schwarz, H. Arendt, O. F. Bollnow 세 사람의 주장에서 공통적으로 비슷한 견해를 찾아볼 수 있듯이,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대상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 사랑을 말한다. 이 사랑이 마치, 보다 인간적인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릴케의 진정한 사랑에서의 소유의 의미는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연인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이것은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나의 삶, 나의 아내, 나의 개, 나의 아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삶, 아내, 개, 그리고 아이, 이 모든 것이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이 내민 양손에 닿는 낯선 형상들이라는 것을.” -‘Das Buch von der Pilgerschaft’ 中, Rilke

삶, 아내, 개, 아이 앞에는 소유 대명사가 붙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형상들은 절대로 영원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릴케에게 있어서 소유의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 그 자체의 내면적 의식과 관련이 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랑을 통해 얻는 성숙한 경험을 소유하는 것이다.


릴케의 사랑은 분명 소유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존재론적인 소유를 의미한다. 대상의 존재 여부와 소유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높은 존재의 소유’ 여부의 문제이다. 즉, 릴케의 사랑은 ‘소유하기 위한 작업’이며 소유하는 것은 항상 더 높은 존재 단계로서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해야 하며, 이렇듯 더 새로운 것을 소유하려는 사랑이 바로 ‘보다 인간적인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소유


‘The hours’에 나오는 세 연인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살아간다는 점이다. 그들은 ‘당신을 위해’라는 말을 통해 대상을 소유하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굉장히 헌신적이고 높은 차원의 사랑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는 릴케의 사랑과 소유의 의미에 따라서, 이것은 착각 속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영화 속의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자신을 사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구스타프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다음의 말을 통해 이것을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존경에서 우러난 연애는 동정에서 시작한 연애보다도 긴 생명을 가지곤 한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더욱 깊게 숨겨진 동기는 항상 오해를 기반으로 하는 자기애에 지나지 않는다.” 

즉, 영화의 인물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당신을 위해서’라는 말을 한 이유는 자기애를 대상에 대한 애정으로 착각했기 때문인 것이다. 릴케에 의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좀 더 높은 존재 단계로서 새로운 것을 소유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의 자기애는 그들 스스로의 성숙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애정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 나온 ‘당신(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사랑했다던 인물들은 더 높은 단계로 가지 못한 자의식을 사랑했던 것이 아닌가싶다. “다 당신을 위해서야! 사랑하니까!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버지니아에게 말하던 레너드도, “평생 당신을 위해 살아갔으니 이젠 편히 가게 해줘”라고 클래리사에게 말하던 리처드도. 


영화의 마지막에 와서 릴케의 진정한 사랑과 소유를 살짝 관찰할 수 있는데, 버지니아가 자살하면서 클래리사와 로라, 그리고 버지니아의 시간이 맞물려진다. 그리고 릴케가 ‘보다 인간적인 사랑’은 여성의 삶 속에서 더욱 찾아볼 수 있다는 말처럼, 영화 속의 여성들이 성숙한 자의식을 획득하게 된다. 버지니아가 남기는 다음과 같은 유서는 버지니아만의 말이 아니다. 나는 이 말이 클래리사와 로라가 깨달은 존재의 더 높은 단계이며, 그 내면의 성숙한 경험을 소유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삶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서 싸우면서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어요. 마침내 그것을 깨닫게 되었고, 삶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이제 그 삶을 접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레너드. 우리가 함께 한 세월, 소중한 시간들. 영원히 그 사랑과 함께 항상 간직할게요.”

영화 속의 사랑하는 사람, 특히 여성들은 스스로의 삶의 무게를 받아들였고 이것은 그들의 실존을 위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되었다. ‘프라하의 봄’에서도 테레사는 토마스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여성의 성기냄새를 맡으며 그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절망하고 슬퍼했다. 그녀에게는 삶이 너무 무거운데, 그녀가 보기에 토마스에게는 삶이 너무 가벼워보였다. 그녀는 릴케에 따르면 더 직접적이고, 더 풍성하고, 더 신뢰할 수 있었기에 남성보다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의 무게를 받아들이듯이, 테레사도 그러했다. 따라서 이것 또한 ‘보다 인간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소유는 스스로의 정신적 성숙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는 것이고, 진정한 사랑은 그 소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